즐거운 상상여행

제1편 중국 동북3성을 아시나요? 압록강이 흐른다 - 단동(丹東) 이야기

관리자
2022-05-19


즐거운 상상여행 (제 1편) / 중국 동북3성을 아시나요?

압록강이 흐른다 - 단동(丹東) 이야기

- 김영식 (동북항일유적연구소장)

 

개인적으로 단동에 4년간 머물면서, 전혀 뜻밖에 깊이 공부하게 된 내용 중 하나는, 단동(丹東, 과거 지명은 안동/安東)이 100년 전 항일운동 역사에 정말로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사실입니다.


1918년 고종황제의 국외망명시도부터, 의친왕 안동역 체포사건,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거의 밝혀져 있지 않았던 한국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의 독립운동 지원활동까지, 모두 단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특별히 이번에는, 그동안 말년 스캔들로 묻혀있던 나혜석의 독립운동 이야기까지를 풀어내 보려 합니다.

 

고종황제 망명을 계획하다

한평생을 항일투쟁에 바친 우당 이회영 선생은, 1910년 일제의 강점 후 여섯 형제 일가를 모두 이끌고 만주 유하현 삼원포로 집단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부민단을 창설하여, 항일독립투쟁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러다 1913년 일본경찰과 조선총독부가 이회영을 비롯한 이시영, 이동녕, 장유순, 김대락 등을 체포 또는 암살하기 위하여 특별 암살대를 파견했다는 소식에, 삼원포를 떠납니다. 그리고 이회영 선생은 일제의 허를 찌르기 위해 국내로 밀입국을 단행해서, 고종황제를 국외로 망명시킬 기회를 엿보게 됩니다.

 

고종황제 망명 추진은 아들 이규학의 신부례를 이용하기로 하였는데, 신부례 상대인 조계진은 조대비의 친족이자 고종의 조카딸이었기 때문입니다. 고종황제가 국외 망명을 결심하던 1918년은, 강점이후 10년 가까운 일본의 무단통치가 실패했고, 전국에서 항일의식이 고조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고종이 국외로 망명하여 일본과 개전(開戰)을 선언하면,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항일전재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국외 망명자금과 행궁까지 준비되며 구체화되어가던 고종의 망명계획은,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갑자기 서거하면서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고종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은 일본의 사주를 받은 궁녀들에게 독살되었다는 설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설이 있는데, 아직도 풀리지 않는 역사의 과제로 남아있습니다. 고종황제가 서거하자, 슬픔에 빠져 이회영 선생은 다시 조국을 떠나 중국에 옵니다.

 

의친왕의 중국망명 시도

이번에는 민족지도자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이회영 선생, 그리고 대동단 김가진 선생이 의친왕 이강의 중국 상해 망명을 추진합니다. 1919년 11월 9일 밤, 종로구 공평동 비밀가옥에서 의친왕과 접촉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합류하라고 권유하여 찬성을 받았습니다.

 

의친왕은 선왕에게 받았던 채권증서와 비밀문서를 가져간다 하였고, 이를 가져오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드디어 의친왕은 11월 10일 밤, 허름한 옷으로 변장하고 수색역에서 중국 안동(단동)행 기차에 올랐습니다. 의친왕이 안동에 도착하면, 영국인 조지 L. 쇼의 이륭양행 배를 타고 상해로 갈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의친왕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 단동에 도착했을 때, 어느새 기다리고 있던 일본경찰들이 달려들어 의친왕을 강제로 차를 태워 신의주로 압송하게 됩니다. 이로서 의친왕 망명사건도 안타깝게 실패로 끝이 납니다.

 

많은 항일역사학자들이 단동을 바라보며 이런 말을 남깁니다. 만약 그 당시 고종이 갑자기 서거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단동역에서 의친왕이 그렇게 잡히지 않았더라면, 우리민족의 항일투쟁 역사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라고.

 

그리고 단동에서 나혜석을 발견하다

의친왕 망명시 도우려 했던 단동 영국인 이륭양행의 조지 L. 쇼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을 만큼, 항일운동의 적극적인 지원자였습니다. 그가 한 일은 한반도를 나와 상해 임시정부를 가려는 독립투사들을 안전하게 단동에서 체류시키고, 선박으로 교통편을 제공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1920년 7월 일본군에게 내란죄로 체포되었습니다. 4개월 뒤에 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그 이후에도 독립군 지원활동을 멈추지 않다가, 1922년 8월 27일 이륭양행 고용원 김문규가 체포되기까지 활동하고 단동을 떠납니다.

 

그런데 그 이후 곧바로 조지 L. 쇼의 빈자리를 채워준 것이 바로, 불꽃처럼 살다간 여자 나혜석입니다.

 

나혜석(1896-1948)이 누구인가요? 진명여학교, 일본 도쿄 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라는 타이틀을 차지한 선각자요, 여성운동 선구자요, 신(新)여성이었습니다.

 

그러던 그녀는 교토제국대학 출신 변호사요, 당시 안동현 일본영사관 부영사인 김우영과 결혼하여 3남 1녀를 낳고, 여류미술가로서 세계적인 평판도 얻게 됩니다.

 

단동에서의 나혜석

그녀는 남편 김우영이 6년간 안동 부영사로 근무할 때, 부영사 부인이라는 신분을 최대 활용하여, 일본군의 감시망을 따돌리고, 많은 독립군들의 국경 넘기와 독립운동을 도왔습니다.

 

한 예를 들면, 1923년 8월 정화암은 김상옥 열사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이 잠잠해지자, 중국으로 재차 망명하려 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국경을 넘는 것 이었습니다. 이 때 정화암은 안동현 부영사 부인 나혜석의 도움을 받습니다.

 

나혜석의 도움으로 압록강을 무사히 건너 봉천(심양)과 천진을 지나 북경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후일 정화암은 “ 나혜석의 도움으로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수가 없었다.”라고 고맙게 회고합니다.

 

나혜석이 독립 운동가들의 국경통과를 도와준 것은, 정화암 경우를 비롯, 대단히 많습니다. 특히 1922-1923년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안동 교통국 근거지인 이륭양행의 역할이 축소되거나 소멸된 시기였기 때문에, 나혜석의 역할은 너무도 필요했고 중요했습니다. 나혜석은 6년간 단동에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나혜석의 3·1운동 참여와 옥살이

나혜석은 단동에 오기 전, 3·1운동에도 적극 참여했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5개월간 옥살이도 했습니다.

 

나혜석은 1919년 3월 2일 김마리아와 황애시덕을 만나 만세운동의 진행방향을 논의합니다. 민족적 거사에 조선 여성계가 본격적으로 참여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나혜석과 김마리아는 일본 동경유학시절부터 조선유학생친목회를 통해 친분을 다진 사이입니다.

 

여기서 나혜석은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담당하고, 개성과 평양으로 떠납니다. 3월 5일 경성으로 돌아온 나혜석은 추가활동을 조직하다가, 3월 8일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릅니다.

 

말년 스캔들에 모든 것이 묻히다

나혜석, 그녀가 했던 선구자적이고 열정적인 독립운동 지원활동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녀를 단지 전통을 거부했던 신여성이요,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더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녀는 6년간의 단동생활을 마치고 남편과 함께 약 1년 반 동안 포상휴가 겸 유럽여행을 떠납니다. 남편은 업무 차 베를린에 머물러야 했는데, 화가였던 나혜석은 미술공부를 핑계로 프랑스 파리에 머물게 됩니다. 여기서 나혜석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기도 한 독립운동가 최린을 만나고 사랑에 빠집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나혜석은 한국에 돌아와, 김우영에게 이혼을 당하고 언론에 매도됩니다. 진정한 사랑을 믿었던 나혜석은 모든 것을 잃고 난 뒤, 최린에게 연락하지만, 최린 주변의 만류로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결국 남편과 애인, 그리고 세상 모두로부터 버림받은 나혜석은 홀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새롭게 인생을 바라봅니다

스캔들 주인공으로만 알았던 나혜석을 단동에서 독립운동 활동자로 다시 만나니, 정말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살펴보면 어느 누구의 인생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 있습니다. 누구나 밝음이 있으면 또 어두운 면도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독립운동가 나혜석을 새롭게 조명하는 역사적 연구도 활발하다 합니다. 새로운 느낌의 나혜석을 생각해보면서, 우리들 주변 분들의 인생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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