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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항일 독립운동가 대표 3인을 위한 추모 시(詩)

관리자
2022-06-20


100년 항일독립운동은 남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습니다. 

남자 못지않은 열혈 독립투사도 계시고, 또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지혜로운 방법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여성분들도 많습니다. 

그 중에 특별히 3분을 선정하여 소개하고 숭모의 마음을 담아 추모시를 올립니다.


첫 번째는 윤희순 여성의병장입니다. 

강원도 춘천에서 <안사람 의병가>로 여성의병대을 일으키고, 

중국으로 넘어와 요녕성 환인현에서는 <노학당>을 세워 독립투사들을 길러낸, 열혈 투사이십니다.

 

두 번째는, 청산구에 잠들어 계신 이진룡 장군의 우씨부인입니다. 

우씨부인은 친정 아버지와 함께 항일전투를 이끈 이진룡 장군을 헌신적으로 내조했습니다. 

남편이 잡혀 평양감옥에서 처형되자, 곧바로 목을 매어 자결했습니다. 이에 인근의 중국인들이 열녀비를 세워주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단동에서 6년간 독립운동가들의 국경넘기를 도와준 나혜석입니다. 

안동현 일본영사관 김우영 부영사의 부인으로 머물면서, 보이지 않게 독립운동가들을 크게 도운 나혜석에 관한 연구는, 

최근 독립기념관 논문에도 발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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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 희 순

 

대한민국 강원도 춘천의 관천리,

임 뵈러 가는 8월의 하늘은 마냥 푸르고,

 

중국 요녕성 환인현의 보락보진,

노학당의 옛터엔, 키 큰 옥수수 밭이 드넓다.

 

유학자 집안의 딸 윤희순,

꽃다운 16세에 결혼하니

시아버지는 춘천 의병장 유홍석,

남편은 항일투사 선봉장 유제원,

 

그뿐인가, 열혈 독립군 아들 유돈상,

팔도 창의대장 시댁 어르신 유인석까지,

유씨 문중이 일심동체로 항일독립에 목숨 바치니

 

돌비석 하나로는 다 기리지도 못할,

위대한 항일가문의 무한헌신이로세.

 

아, 외세의 바람 앞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위태로운 조국 앞에서

1895년 을미사변에 분노한 백성들,

 

전국 방방곡곡에 의병 되어

성난 들불처럼 타오르자,

윤희순도 여성의병장으로 뛰쳐나와

수줍던 조선의 여성들에게 소리쳐 외쳤으니,

 

안사람들이여 일어나라!

며느리들이여 총을 메라!

가서 아들을 돕고,

남편의 뒤를 따르라!

 

그때 불렀던 <안사람 의병가>는

아직도 낭랑한 메아리로 남아

한국 춘천의 하늘에 생생하게 들려온다.

 

가정리 여우내골

첫 여성 의병대 30여명,

군자금 모아 무기 만들고

물심양면으로 의병들 지원하던 투혼은,

압록강 건너 국경을 넘었다.

 

1912년

중국 봉천성 환인현에 노학당 세우고,

스스로 교장 되어

독립투사 키워낸 열혈투사로 거듭났어라.

 

유씨 문중 의병장의 착한 며느리,

독립투사를 내조한 지고지순의 아내,

세 명의 아들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시킨 항일의 어머니,

그리고 우리나라의 첫 여성의병장.

 

그녀 인생 앞뒤 좌우 어디를 보아도

항일운동의 선봉에 섰던 참 선구자였네.

 

계속되는 항일투쟁의 현장에서는

그 어떤 슬픔도 사치였어라.

 

정신적 지주 시아버님도 잃고,

사랑하는 남편도 안타깝게 먼저 보내고,

일제탄압에 1915년 노학당 마저 폐교 되었지만,

 

그녀는 그 후로도 20년간,

항일투쟁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네.


아, 그러나 1935년 큰 아들마저,

무순의 독립청년단을 이끌다 잡혀

일제의 모진 고문 끝에 결국 사망하자,

 

아들 시신 부여잡고 11일을 울먹이다 쓰러져

끝내는 그녀 자신도 숨을 거두니,

 

봉천성 해성현의 8월초 잿빛 하늘이

깨지고 터지듯 통곡하며,

서러운 빗줄기를 애달프게 쏟아 붇더라.

 

투사의 마지막 가는 길,

하늘마저 울고

땅도 흐느꼈으니,

 

여성의병장 윤희순의

일편단심 항일투혼은,

 

온 반도가 기억하고

대륙이 칭송하노라.

 



해서(海西)명장 이진룡 장군과 열녀 우씨 부인을 추모하며

내외 절의 (內外 節義)

 

지아비는 의(義)에 죽고

지어미는 열(烈)에 죽으니,

한 집안에 두 절의(節義)가 났도다.

경경한 그 빛 천추(千秋)에 빛나리라.

 


우씨 부인의 마지막 편지 -

<서방님 전상서>

 

서방님, 벌써 1년 전이네요.

서방님께서 왜놈들에게 잡혀가시던 모습이,

아직도 제 눈에 선합니다.

아니,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 잊혀 지지가 않습니다.

 

차마 인간으로서는 행할 수 없는 잔악한 방법이었지요.

호송하기 전, 서방님의 팔과 다리를 철편으로 내리쳐

무지막지하게 부러뜨리는 만행도 모자라서,

아, 턱 밑 쇄골의 빗장뼈를

철사 줄로 찢어 뚫고 꿰맨 채, 꽁꽁 묶어서 끌고 갔지요.

 

아마도 그만큼, 우리 서방님이 무서웠나 봅니다.

이전에 일본 놈들에게 세 번이나 붙잡혔었지만,

그때마다 매번 탈출에 성공하셨음을 두려워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서방님을 <번개다리>라 불렀습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축지법을 쓴다할 만큼 신출귀몰했으니까요.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과 대대적인 토벌작전에도

이진룡 평성의병 유격부대만큼은 도무지 잡을 수가 없었지요.

 

급기야 왜놈들이 서방님 체포령을 내리고, 엄청난 현상금도 걸고,

‘임곡’이란 자를 매수, 의사노릇하며 3년간 정보수집 끝에

결국 우리 은신처가 발각당한 것은, 너무도 비통한 일이었습니다.

 

서방님, 비록 잡혀가시던 날의 기억은 너무도 끔찍하지만,

돌이켜 보면, 서방님과 행복했던 기억도 참 많습니다.

 

고백하건대 제가 처음 시집와서는,

무엇보다, 6척이 넘는 듬직한 서방님의 체구에 반했답니다.

 

게다가, 열 다섯살에 경서를 통달할 만큼 영특하시고,

지(智), 덕(德), 용(勇)이 합일된 훌륭한 인격까지 갖추심에,

저는 너무도 뿌듯하고, 서방님이 참으로 자랑스러웠습니다.

 

더욱더 고맙고 감사한 것은,

서방님께서는, 우병렬 - 제 아버님에게도

더없이 자랑스러운 사위였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1905년 을사늑약이후,

장인어른과 함께 무려 5천명에 이르는 평산 의병대를 일으키고,

그 선봉에서 불사조처럼 항일무장투쟁을 이끈,

100전 100승의 최강 유격대장 이진룡,

 

해서명장(海西名將) 이진룡 장군은,

우리 후대의 역사가 분명히 기억해줄 것입니다.

 

아, 그리고 저는 조금 전 - 평양감옥으로부터

서방님께서 남기신 최후의 유언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 국모를 시해하고, 우리 국부를 위협하고

우리 강토를 빼앗고, 우리 백성을 노예로 삼았으니

고금 천하에 도리어 사리에 어긋나다 함이

너희 같은 자가 없거늘,

나를 어찌하여 반역이라 하느냐?

너희 같은 왜적을 토멸하여 국권을 되찾는 것이

국민된 나의 사명이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서방님의 부하 황봉운 등은 죄가 없고

모두가 혼자 한일이니, 저들은 풀어주라고 재차 강변하셨다지요.

끝까지 교수대에 올라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으셨다지요.

 

역시, 우리 서방님이십니다.

역시, 이진룡 장군이십니다.


저 또한, 서방님의 아내입니다

저 또한, 이진룡 장군의 안사람입니다.

이제 저도, 서방님의 뒤를 따라 가렵니다.

 

분명 나의 서방님은,

이승을 떠나 저승에 가서 조차,

조국독립의 그날만을 쉼 없이 기원하시겠지요?

 

그런 서방님과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서방님 곁에서 끝까지 -

조국독립을 기원하고, 또 기원하겠습니다.

 

이렇게 -

마지막 글을 남기고,

열녀 우씨부인은

목을 매 자결하였습니다.

 

한편, 이 소식을 접한

청산구의 중국주민들은 감동을 받고,

자발적으로 뜻을 모아 <의열비>를 세워줍니다.

 

중국인들조차 칭송하여 지금까지 전해오는 -

이진룡 장군의 우씨부인

그 의열비문을 마지막으로 읽으며,

 

이진룡 장군과 우씨부인을

한번 더 마음깊이 추모합니다.

 

<우씨부인 의열비문>

 

조선 의사(義士) 이진룡은

열부 우씨와 곰의 민족 - 조선을 택했노라.

 

남편은 나라위해 죽었으니, 역사의 충신이며

부인은 남편따라 순절하니, 홍실의 가풍일세

 

해가 지고 달이 뜨니, 큰 봉황이 날아오르네.

충신열녀 서로 어울리니, 우리의 자랑이어라.

 



불꽃같은 여자

나혜석의 3색 아리랑

 

하나, 짙푸른 아리랑 - 나혜석의 <한(恨)>

 

불꽃같은 여자, 나혜석의 인생엔

풀지 못한 사랑의 <한(恨)>이 있습니다.

 

나혜석은 일생동안 세 남자를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1913년 시작된 일본 유학시절, 첫 사랑을 만났습니다.

시인 최승구 인데, 그는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습니다.

1916년 2월에 폐결핵으로 갑자기 최승구를 잃었을 때,

나혜석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신경쇠약까지 걸린 나혜석을 붙잡아 준 이는,

바로, 교토 제국대학 법학과의 김우영 이었습니다.

1920년 4월에 정동교회에서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때 나혜석이 남편에게 요구한 조건 중 하나는, 놀랍게도

‘첫사랑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김우영은 그녀의 말을 기꺼이 들어주었습니다.

남편 김우영은, 나혜석에겐 그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결혼생활 10년 중, 약 7년을 함께 살았는데,

그중 6년을 산 곳이 바로, 중국 안동현, 지금의 단동입니다.

 

이후 1927년 여름, 일본 외무성이 남편에게 준 포상휴가로

두 사람은 함께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얼마 후, 남편 김우영은 법률공부를 위해 베를린으로 떠났고,

나혜석은 미술공부를 위해, 홀로 빠리에 남습니다.

거기서 그녀는 세 번째 운명의 남자, 최린을 만납니다.

최린은 3·1독립운동 때 독립선언서 작성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입니다.

 

나혜석과 최린, 두 사람의 연애사건은 빠리를 떠들썩하게 했고,

결국 귀국한 뒤 1930년에, 나혜석은 김우영에게 이혼을 당합니다.

그 과정에서 나혜석은, 최린에게마저 버림을 받고 모든 것을 잃습니다.

 

그런 이후, 최후의 나혜석은,

세상 모든 이들에게 버림받고 완전히 잊혀진 채,

1948년 추운 겨울날, 짙푸른 한(恨) 만을 홀로 가슴에 품고,

시립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외롭게 세상을 떠납니다.

 

둘, 황금빛 아리랑 - 나혜석의 <흥(興)>

 

조선의 첫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의 예술세계는,

그녀의 인생만큼이나 격정적이고, 늘 새로움을 추구하기에

화폭엔 그녀만의 황금빛 흥(興)이 넘쳐 납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제대로 된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냥 ‘아기’로 불렸습니다.

열다섯 살 때, 서울의 진명 여학교에 편·입학하면서

집안의 돌림자인 ‘석(錫)’을 넣어,

비로소 <혜석>이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나혜석은 1913년 열 여덟 살 때,

도쿄여자 미술대학으로 유학을 갔고, 서양화를 배웠습니다.

이때부터, 여성 첫 서양화가, 신 여성, 그리고 시대의 선각자로

세간의 주목과 관심을 끌기 시작했습니다.

 

1921년 경성일보 내청각에서 개최된, 개인전을 시작으로,

화가의 길을 걸으며 나혜석이 남긴 수많은 작품들은,

그녀가 조선여성의 봉건적 굴레와 틀을 과감히 깨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려했던, 용트림 흔적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특별히, 말년 스캔들의 무대였던 빠리에서 나혜석은,

거장 피카소와 마티스의 작품 세계에 깊이 빠져듭니다.

그 중 1929년에 그린 나혜석의 <자화상>이란 작품을 보면,

빠리 야수파에 눈뜬 시절의, 화려한 색채와 필치가 선연합니다.

 

비록 그녀 인생은 암울했지만, 예술가 나혜석의 작품세계는,

늘 새로움을 꿈꾸며 어디든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찬란한 봄날의 노랑나비를, 참 많이도 닮아 있습니다.

 

셋, 검붉은 아리랑 - 나혜석의 <혼(魂)>

 

끝으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나혜석의 진짜 모습 중 하나는,

대단한 항일정신과 민족혼을 지닌, 여성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입니다.

 

비록 그녀의 작품세계에 가려지고, 또 말년의 스캔들에 묻혀,

오랫동안 잊고 간과 되었었지만, 이제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단동의 자랑스런 여성 독립운동가 나/혜/석!

 

결혼 이듬해인 1921년 10월부터 약 6년간 남편 김우영은,

일본 안동영사관 부영사로 근무했고, 거기서 그녀도 함께 지냈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십대 중반부터 삼십 초반까지,

안동현의 6년이야말로 나혜석 인생의 황금기였습니다.

그녀 스스로가 후일 고백하기를,

그곳은 나혜석이 사회상으로 사업을 처음 해 본 곳이요,

개인적으로 남을 돌아보게 된, 인생 2막 같은 시간이었다고 했습니다.


우선, 여자 야학을 설립하여, 미취학 아동들의 교육을 보살폈고,

안동현 부인친목회를 조직하여, 한인자치 활성화를 도왔습니다.

그녀에게 안동현은, 여성 자각을 넘어, 민족 자각의 시간들이었습니다.

당시 안동현은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대륙으로,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로 가는 중요 관문이었습니다.

나혜석은 그곳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적극 돕게 됩니다.

 

나혜석 개인적으로는, 1919년 3월 8일,

여성들의 만세운동 참여를 도모하다가 이화학당에서 체포되어,

약 5개월간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기도 했지만,

안동현은, 그녀에게 전혀 새롭고 무거운 역할로 다가왔습니다.


남편 김우영이 일본영사관 부영사로 안동현에 부임하기 전까지는,

파란 눈의 영국인, 조지 엘 쇼우가 이륭양행을 통해,

헌신적으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국경통과를 도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일본에 내란죄로 체포되면서, 도움의 길은 막혔고

이후 독립운동가들의 국경통과를 돕는 일들은,

어느 새 운명처럼, 나혜석 부부의 몫이 되었습니다.

남편이 일본영사관의 부영사라는 것이, 오히려 큰 힘이 되었습니다.

 

비록 일본은, 남편을 내선일체의 선전도구로 활용하고자 했지만,

남편은 나혜석을 도우며,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외줄타기를 했습니다.


1920년대 --, 항일투쟁 역사흐름에 너무도 긴박했던 시기에,

의열단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보이지 않게 적극 도와준,

단동 여성 독립운동가 나혜석의 용기와 헌신, 그리고 민족정신은,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배우고 기억해야만 할,

불꽃같은 여자 나혜석의 - 진정한 진/면/목(眞面目)이요,

오래도록 우리 함께 계승하고 간직해야 할,

<검붉은 - 민족 혼(魂)>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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