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상상여행

우리가 안중근을 사랑하는 이유 * 10가지

관리자
2022-06-20


1. 3국이 모두 존경하는 유일한 항일영웅

안중근 의사는 한국은 물론, 북한과 중국이 함께 인정하고 모두 존경하는 거의 유일한 항일영웅입니다.

현재 한중간 신뢰증진의 핵심코드로 이미 안중근의 항일은 매우 훌륭한 아이템이 되고 있지만, 

더 나아가 향후 통일시대의 남북한 연결고리로서도, <안중근>은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자산이고, 통일공감대가 될 것이라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가 안중근 의사를 사랑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2. 북두칠성을 품은 응칠

안중근의 어릴 적 이름은 응칠(應七)입니다. 

가슴과 배에 걸쳐 7개의 점이 있었는데, 북두칠성에 응한 것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입니다. 

감옥에서 안중근이 직접 쓴 자서전의 제목도 <安應七 歷史>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안중근이란 이름은, 본시 그의 성격이 좀 급하고 가볍기에, 뿌리 튼튼 무겁고 진중하라고 지어준 이름입니다. 

오~ 영웅에게도 인간적인 결점은 있었네요. 그러나 자신의 결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잘 다스렸기에, 안중근은 역사의 획을 긋는 진정한 영웅이 되었답니다.

 

3. 평화를 사랑한 박애주의자

총으로 이등박문을 저격한 안중근을, 일본은 지금까지도 폭력적인 테러범으로 몰아세우지만, 

사실 안중근은 평화주의자요, 생명을 대단히 중시하는 박애주의자였습니다.

대한의군 특파독립대장으로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 회령 등에서 일본경찰서와 군부대를 공격한 후, 

안중근 대장이 잡았던 일본군 포로들을 모두 살려서 보낸 일화는 유명합니다. 

비록 그로인해 아군의 위치가 노출되어 참패했지만, 안중근은 그때 자신이 한 일을, 후일 자서전에서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조국을 위해 기꺼이 내어 놓은 영웅 안중근은, 결코 타인을 향해서는 폭력주의자나 테러범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평화를 사랑하고 인간의 생명을 누구보다도 소중히 여긴, 진정한 박애주의자였습니다.

 

4. 영웅됨은 모전자전 (母傳子傳)이 뿌리

안중근 의사께는 영웅 같은 훌륭한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계셨습니다. 

조여사는 사형집행을 앞둔 옥중의 아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네가 만약

늙은 이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니라.”

 

그리고 아들의 마지막 수의를 손수 지어서 보내주었습니다. 

이렇게 아들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가족을 이끌고 연해주로 망명을 가 <독립운동의 대모>로서 역할을 자처했고, 

1920년 4월 상해임시정부가 생기자, 상해로 달려가서 김구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함께 독립운동의 안살림을 챙겼습니다.

 

5. 백발백중 명사수

어려서부터 본디 말타기와 총쏘기를 즐겨한 안중근은 대단한 명사수였습니다. 

하얼빈역에서 이등박문을 처결할 때, 발사된 7발이 모두 원하는 곳에 명중된 사실은 대단히 놀라운 결과입니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안중근은 성공적인 거사를 위해, 모처에서 몇 달간 고된 사격연습까지 해온 것으로 전해집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렸습니다. 

하늘이 주신 단 한 번의 기회를 절대로 놓칠 수 없었기에, 철저히 준비했고, 또 기꺼이 온몸을 던져 노력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늘도 감동하여 도왔고, 마침내 거사가 성공한 것입니다.

 

6. 100년을 앞선 동양평화론

안중근의 국권회복을 위한전략이 독립전쟁 전략이라면, 그의 사상을 대표하는 것은 <동양평화론>입니다. 

약속을 어긴 빠른 사형집행 탓에, 미처 다 쓰지 못하고 간,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골자는 이렇습니다.


(1) 중국 여순을 동양평화의 근거지로 만들고,

(2) 한중일 공동의 군대를 편성하며,

(3) 한중일이 동양평화회의를 창설하고,

(4) 한중일 공동은행을 만들어 공용화폐를 발행하고,

(5) 동아시아 곳곳에 동양평화회의 지부와 공동은행 지점을 설치하며,

(6) 로마교황 사절을 초빙하여 평화를 위해 중재하자


살펴보면, 지금 시점에 평가해도 매우 획기적이며, 

무려 100년 이상을 앞서, 현재의 EU 유럽연합체제와 비견해도 결코 손색이 없는, 선구자적인 평화 제안이었고, 멋진 이상(理想)이었습니다.

 

7. 명필 서예가

안중근은 자서전에서 자신은 공부보다는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겨했다는 겸손한(!) 표현을 했지만, 

사실은 집안이 대대로 학식과 덕망이 높았습니다. 조부는 현감을 지냈고, 부친은 신동이라 불릴 만큼 총명했습니다.

그런 가풍의 영향아래 자란 안중근도 학문의 깊이는 물론, 서예가로서도 손색없을 만큼의 대단한 필력을 남깁니다. 

옥중에서 쓴 많은 작품들이 그 학문과 정신의 깊이에서나 필체 자체에서나, 

당시 적국(敵國)이었던 일본에서조차 최고 보물급으로 인정받으며 보관되고 있습니다.

 

또한 중국 흑룡강성 상지시에 가면, 서법 문화박물관이 있는데, 여기에도 안중근 의사의 6개 서예작품이 비석에 새겨져 중심통로에서 전시되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부단한 노력으로 문무(文武)양면에 최고의 실력을 겸비했던 진정한 우리의 영웅 안중근입니다.

 

8. 참 군인

안중근은 참 군인이었습니다. 

소속과 직책은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끝까지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재판과정에서 안중근은 일관되게 이점을 주장하여, 본인의 거사가 전쟁 중에 적군을 사살한 행위임을 천명했으나, 

일본은 개인 테러범이요, 살인자로만 재판했습니다.

 

일각에 안중근 의사(義士)라는 호칭도 군인이 아닌 개인적인 행위였음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어, 

정확히는 안중근 의사보다 <안중근 장군>으로 불러야 옳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9. 처참했던 가족희생을 잊지 말자!

한편, 안중근의 가족들에게 안의사의 거사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민족의 영웅 아버지가 기쁨이었을까요, 아님 고통이었을까요? 

이런 관점은 동북항일유적연구소장으로서 개인적으로 헤아려 본 작은 소견임을 먼저 밝힙니다.

 

몇 년 전 저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에서의 11일간 행적지를 찾아가면서, 

문득 비교적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는 안중근 친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가슴이 너무 아리고 눈물이 솟구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안타까운 측면은, 옥중 자서전에서 안중근 의사가 자신의 성격을 급하고 가볍다고 고백했는데, 

저는 어디에도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그런 성격 탓에 나라걱정과 독립운동에만 몰두한 나머지, 

세심하게 본인 가족을 챙기는 것까지는 제대로 못했으리란 짐작을 감히 해봅니다.

 

실제로 안중근의 의거 결심을, 부인 김 아려 여사나 어린 두 아들은 전혀 몰랐고, 

그래서 1909년 10월 27일 부인과 아들은, 너무나 오랜 동안 만나지 못했던 남편과 아빠를 보고 싶은 일념에, 아무런 상황도 모른 채 하얼빈에 옵니다.

 

이등박문 사망으로 한국인 체포령이 내려져 모두가 잡혀갈 때, 

정대호가 자기 여동생이라고 속여 겨우 화를 면하고, 25일간 숨어 있다가 남편과 아빠가 잡혀간 소식만 접한 채, 

결국 얼굴 한번 보지도 못하고 간신히 살아 하얼빈을 떠납니다.

 

두 번째 안타까운 측면은, 그 이후로도 안중근의 남은 가족들은 웬일인지 독립군 동지들이나, 임시정부를 포함 조국으로부터, 

끝까지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그 결과 큰아들 분도는 12살 때 누군가 준 과자를 받아먹고, 그 과자를 동생에게 주려고 오다 독살 되었고, 

졸지에 가장이 된 동생 준생은 남은 가족들을 지키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서른 살이 넘도록 숨어 다니며 일본으로부터 핍박을 받아 제대로 된 밥벌이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일본군에 붙들렸고, 어머니와 가족 모두를 죽이겠다는 비열한 협박에 못 이겨, 이등박문의 손자에게 강제로 공개사과를 할 수 밖에 없었고, 

이것으로 만천하에 친일 변절자로 낙인찍힙니다.

 

안중근을 소재로 한 어느 소설 속에서, 이러한 둘째 아들 준생의 절규가 가슴 아프게 표현됩니다. 

<“나의 아버지는 나라에는 영웅이나, 가족에게는 재앙이었습니다. 반대로 나는 나라에는 재앙이나, 그래도 남은 가족에는 영웅이고 싶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지키고 돌봐 주지 않은 안중근의 가족들. 그 처참하고 안타까운 희생은, 

어쩌면 그보다는 편히 살아온 우리 모두를 대신한 것 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더욱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영웅 - 안중근의 역사입니다.

 

10. 일본 간수(看守)도 존경했던 영웅

안중근을 존경하고 잊지 않고 있는 곳은, 일본에도 있습니다. 

일본 대림사 사찰에는 안중근의사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지난 105년 동안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인생의 멘토로 평생 기리며 살고 있습니다. 

모 TV에서도 방송된 이 사연의 주인공은 바로, 여순감옥에서 안중근을 감시했던 일본헌병 지바 도시치와 그 가문입니다.


처음에는 당시 일본에서 대단한 인물이었던 이등박문을 저격한 안의사를 증오했으나, 

감옥안에서 언제나 겸손하고 단정한 안의사의 인품에 점차 감복해, 후에는 인생의 멘토로 우정을 나누게 되었답니다.

 

안의사는 순국직전 지바 도시치에게 <爲國獻身 軍人本分 -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라는 유묵을 전하기도 했는데, 

그 유묵 원본이 지금도 일본 대림사에 보존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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