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상상여행

제2편 국민가요 <눈물 젖은 두만강>과 독립투사 <문창학>이야기

관리자
2022-07-06

즐거운 상상여행 (제2편)

국민가요 <눈물 젖은 두만강>과 독립투사 <문창학> 이야기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젖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님을 싣고

떠나던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님이여 그리운 내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우리나라가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독립무장투쟁을 국내외에서 굳세게 이어나가고 있을 무렵에, 두만강이 흐르는 중국 도문지방에서 있었던 실화이다. 경남 거제 출신의 <이시우>라는 작곡가는 <예원좌>라는 극단에 소속되어 중국 동북부 일대를 돌면서 순회공연을 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시우는 잠이 오지 않아 자신이 머물던 여관 뒷마당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때 마침 같은 동포인 여관 주인이 나와서 나무 두 그루를 가리키며, 두만강을 건너 이곳 중국 도문으로 이사 올 때, 조국에서 가지고 온 나무들이라 설명한다. 그 말을 듣고 늦은 밤, 방에 돌아 온 이시우는 빼앗긴 조국에 대한 서러운 마음을 노래로 표현해야겠다고 생각을 하며 오선 줄 위에 악보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작업이 잘 되질 않아 끙끙거리고 있을 때이다. 갑자기 여인의 비통하고 애절한 통곡 소리가 들렸다.

 

이에 이시우가 깜짝 놀라 서둘러 사람들에게 사연을 물으니, 그 여인은 조국 광복을 위해 독립무장투쟁을 하다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총살당한 문창학의 부인 김씨(당시 30세)라고 했다. 꼭 일본의 손아귀에서 조국을 광복시키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고 나간 남편이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자, 이곳저곳으로 남편을 찾아 헤맸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남편이 일본인들에게 총살당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정말 기가 막힐 일을 당한 것이다. 그런 그녀가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오늘 이곳 여관에 머무르게 된 것은, 그날이 죽은 남편 문창학의 생일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녀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과감히 내놓고 비명으로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남편 문창학을 위해 오늘밤 혼자 조용히 술이나 한 잔 부어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미 친분이 있던 여관 주인이 제물을 차려서 내오니, 복받치는 설움에 그동안 참고 참았던 슬픔을 진한 눈물로 토해내고야 말았다는 것이다.

 

이 사연을 듣고 이시우는 큰 충격을 받았다. 다음날 아침, 두만강에 다다른 이시우는 나라 잃고 헤매는 우리 민족의 설움을 다시금 가슴 찡하게 된다. 갑자기 이시우는 두만강의 푸른 물이, 나라 없는 우리나라 백성들이 소리 없이 흘리는 눈물처럼 보였다. 그때부터 이시우는 마구 악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가요 <눈물 젖은 두만강>이 탄생했다.

 

국민가요 <눈물 젖은 두만강>은 단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북한의 월간 대중잡지 <천리마> (2005년 5월호)에서도 이 노래의 창작 동기와 과정 등을 상세히 소개한 바 있다. 우리와 똑같은 사연으로 기술하고 있다. 북한에서도 이 노래를 <계몽기 가요>(일제 강점기에 나온 노래) 중 대표곡으로 꼽고 있다.

 

작곡가 이시우(李時雨) 선생의 본명은 이만두(李萬斗)이다. 만주 하얼빈상업학교(1932. 4.1 ~ 1936. 3.10)와 만주국립대학(1936. 4.1 ~ 1941. 3.10)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했다. 일반경력으로는 매일신보사 하얼빈지국 근무(1941년), 조선상공신문 하얼빈지국(1941 ~ 1945)에 근무하다가 1945년 해방으로 귀국했다.

 

한편, 항일독립투사 문창학은 두만강 가에서 태어났다. ‘두만강(豆滿江)’이라는 ‘두만(豆滿)’은 말 그대로 해석하면 ‘콩이 가득하다’라는 뜻이다. 물론, 두만강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지만, 글자 그대로를 해석하면 두만강 지역이 콩을 비롯한 밭농사가 아주 잘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두만강이라는 맑은 물과 농사짓기 좋은 평야지대를 형성하고 있는,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가진 함경북도 온성군 미포면에서 태어난 문창학은 어렸을 때부터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고 한다.

 

농사지을 땅이 많아 부농이었던 문창학은 부러울 것이 없이 다복하게 자랄 수 있었기 때문에 꿈도 많았다. 그러나 문창학의 밝은 미래를 설계하는 아름다운 꿈은, 1910년 한일합방이라는 나라를 잃는 치욕적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문창학은 방황하기 시작했다. 나라 잃은 깊은 슬픔에 빠져 도무지 헤어 나오기가 어려웠다. 이렇게 문창학이 방황하고 있을 때, 이웃한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어나 일찍이 러시아로 망명한, 평소 존경해오고 있었던 10년 연배의 사촌형 문창범이 구세주처럼 그를 찾아왔다.

 

문창범은 이미 이때 이상설·이동휘 등과 함께 러시아를 중심으로 전방위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다. 그러니까 문창학이 독립운동을 시작한 것은, 바로 사촌 형이었던 문창범의 영향이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문창학은 1919년 기미년 3월 1일 “대한독립만세”을 외쳤다. 3·1 운동에서 돌아 온 문창학은 다시 조국의 광복을 위해 골똘히 궁리했다. 그리고 4년 선배이자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김학섭 동지의 의견에 따라 1922년 1월 2일, 웅기항(雄基港)을 습격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연말연시를 맞아 일(日)군경이 합동으로 특별 경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사를 치루기도 전에 붙잡힐 상황이었다. 문창학을 비롯한 다른 동지들은 일단 웅기항 습격 계획을 철회하고, 문창학이 근무하여 모든 정보를 입수한 신건원 주재소를 습격하기로 결의했다.

 

문창학은 선봉주자로 제일 먼저 신건원 주재소로 향했다. 모두가 고요히 잠든 1922년 1월 5일 새벽 12시 30분경 신건원 주재소에 도착했다. 문창학은 불빛으로 동지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렸다. 그 신호를 본 김학섭을 비롯한 모든 동지들은 10분 뒤 일제히 빗발 같은 사격을 시작했다. 급기야 숙사에 머무르고 있었던 일본 순사 송기안태랑(松岐安太郞)이 사살되었다. 그리고 숙사도 파괴되었다.

 

주재소는 일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일군경이 반격을 가해 오고, 이에 우리 독립투사들은 굴하지 않고 폭탄 2개를 투척하며 끝까지 일군경과 교전하다가 신건원 주재소를 무사히 빠져 나왔다. 이로써 신건원 주재소 습격 사건은 완전한 성공으로 마무리 짓게 된다.

 

신건원 주재소에서 좋은 성과를 거둔 독립투사들은 더욱 의기투합하여 조국 광복을 위해 온힘을 쏟아 부었다. 만주 훈춘에서 일경 습격과 밀정처단을 실행하는 등 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맹렬했다. 그렇지만 그 후에 일본 경찰의 추적은 악랄했고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결국 1922년 12월 어느 날, 문창학과 김학섭(金學燮) 등은 일제 밀정의 밀고로 독립투사 동지들과 일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청진으로 압송되었다. 문창학과 김학섭 등 13명은 1923년 5월 26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사형, 무기징역, 10년 징역형 등 중형을 선고받는다.

 

1923년 9월 28일, 경성 복심법원에서 문창학과 김학섭은 공소가 기각되어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1923년 11월 8일, 역시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됨에 따라 1923년 12월 20일 사형 순국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아내 김씨는 나중에서야 전해 듣게 된 것이었다.

 

국민가요 <눈물 젖은 두만강>은 이러한 슬픈 사연을 담은 노래이다. 작곡가 이시우와 독립투사 문창학의 아내가 묵었던 그 여관은, 현재의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 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더 알 수는 없다.

 

비록 여관의 흔적은 찾을 길 없고, 이제 더 이상 두만강물이 푸르지도 않지만(인근지역 북한 광산개발의 영향으로 흙빛 물이 되었음), 그 사연을 담은 <눈물 젖은 두만강> 노래는 남아서, 남북한 모두에서 애틋하게 애창되고 있다.

 

특별히, 내년 2023년이면 독립투사 문창학의 순국 100주년이다. 내년에는 꼭 한번 도문에 들러 문창학 아내 김씨가 통곡했던 두만강가를 거닐며, 문창학 부부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눈물 젖은 두만강>노래 한 소절이라도 불러드리고 싶다.

 

** 여러 관련서적에서, 김영식 동북할일유적연구소장이 그 의미를 정리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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